전쟁 중 러시아 대선 실시는? 투표 방해와 이를 막으려는 당국의 처절한 싸움?
전쟁 중 러시아 대선 실시는? 투표 방해와 이를 막으려는 당국의 처절한 싸움?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4.03.17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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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대선 투표 분위기가 여느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미사일·포탄과 드론이 날아다니는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1천Km 이상 떨어진 모스크바를 비롯해 러시아 곳곳에서 투표함에 녹색 잉크 붓기, 기표소 방화, 화염병 투척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틀 째 투표가 끝난 16일 현재 투표율은 58%에 이르렀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와 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 대선 투표 첫날(15일)과 둘째날(16일), 일부 지역에서 투표소가 설치된 공공 건물로 화염병이 날아들고, 기표소가 방화로 불타고, 투표함에 녹색 잉크가 투척되는 등 선거 방해 행위가 잇따랐다.

위로부터 기표소에 방화하고, 화염병을 투척하고 투표함에 잉크를 쏟아붓는 장면/영상 캡처

이같은 선거방해 행위는 최고 징역 5년형에 처해진다. 예전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사건들이 이번 대선에서 잇따라 발생하는 것은 두가지 이유에서다. 2년을 넘기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와 수감중 돌연사한 야권인사 알렉세이 나발니의 죽음에 대한 저항의 표시다. 

◇ 전국 각지서 발생하는 투표소 '테러'

흥미로운 것은 기표소에 불을 지른 뒤 이를 휴대폰으로 찍는 할머니, 투표함에 녹색 잉크를 부은 뒤 이를 촬영하는 20대 여성, 화염병 투척 순간을 기록하는 또다른 여학생 등 사건을 저지른 당사자들이 너무나 태연하다는 점이다. 영상을 보면, 그렇게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는 모습들이 아니다.

체포된 뒤 사건을 저지른 이유도 각양각색이다. 모스크바에서 투표함에 녹색 잉크를 부은 여성은 우크라이나 정보기관에 속았다고 했고, 비슷한 잉크 테러 순간 체포된 한 남성은 '은행 대출에 대한 전화를 받았다'고 진술했으며, 또 다른 여성은 3만 루블 제안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녹색 잉크 테러가 모스크바를 비롯해 보로네시, 로스토프, 카라차이-체르케시야, 크림반도의 심페로폴 등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는 점에서 당사자들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는 해석도 나온다.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도발이라는 것이다.

특히 녹색 잉크가 주는 상징성도 있다. 지난달 옥중 사망한 나발니가 2017년 괴한으로부터 녹색의 살균제 테러를 당했다. 자칫하면 실명할 뻔했다. 러시아 선관위 측은 녹색 잉크로 훼손된 투표함은 봉인한 뒤 새로운 투표함을 설치, 투표를 계속하도록 조치했다. 녹색 잉크로 범벅이 된 투표 용지를 유효한 것으로 인정할지 여부는 추후 논의될 것으로 알려졌다.

나발니 장례식 모습/캡처

잉크 테러보다 더 심한 것은 투표소 방화사건이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투표소가 설치된 학교로 화염병이 날아들었고, 우랄지역 한티만시 자치구에서는 한 여성이 화염병으로 투표함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 15일 첼랴빈스크에서는 80대 여성이 투표소에서 폭죽을 터트렸고, 투표소의 기표소가 불타는 영상도 인터넷에 올라왔다.

엘라 핌필로바 러시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은 16일 "20개 지역의 29개 투표소에서 투표 방해 사건이 발생해 214개 투표함이 훼손됐다"며 투표함의 보안 강화를 주문했다. 그녀는 "투표함에 액체를 부은 사람은 최고 5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것"이라며 "그들은 돈을 받고 이러한 행위를 했다"며 쓰레기들이라고 불렀다. 

◇ 러시아 투표 방해를 겨냥한 우크라군 공격

돈바스 지역(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과 자포로제(자포리자), 헤르손 주 등 러시아 연방에 편입된 우크라이나 4개주 투표 상황은 당초 예상대로 혼란스럽다. 헤르손주 카호프카와 브릴료프카 투표소에는 15일 우크라이나군의 포탄이, 자포로제 지역에선 드론이 날아들어 투표가 중단됐다. 또다른 도시에서는 투표소 인근 쓰레기통에 설치된 즉석 폭발 장치가 폭발했고, 베르단스크에서도 유사한 폭발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 국경 도시를 겨냥한 우크라이나군의 포격도 잇따르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접한 벨고로드주 주지사인 뱌체슬라프 글라트코프는 16일 텔레그램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미사일 공격으로 주민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다쳤다고 말했다. 소셜미디어(SNS)에는 벨고로드에서 포격으로 차량이 파괴되고 화염이 치솟는 영상이 올라왔다. 

국경 도시 벨고로드 포격. 차량이 불타고 있다/캡처

또 사마라 지역의 정유 공장 2곳이 이날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을 받았다. 

러시아 집권 여당 '통합러시아'는 16일 웹사이트와 도메인 등이 '디도스 공격'(DDoS, 분산서비스거부)을 받고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해 비필수 온라인 서비스를 중단했다고 주장했다. 디도스 공격은 특정 서버에 많은 양의 접속(트래픽)을 유발해 인터넷 서비스를 마비시키는 해킹 수법이다. 

러시아 외무부는 "우크라이나가 서방으로부터 더 많은 원조와 무기를 받기 위해 러시아 대선 기간 테러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며 "대선 투표를 방해하려는 우크라이나의 도발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투표 방해를 위한 우크라니아의 도발이 현지에서는 오히려 역풍을 부르고 있다고 미 워싱턴 포스트(WP)가 15일 보도했다. 

WP는 "거의 매일 우크라이나의 공격을 받는 벨고로드 주민들은 우크라이나측의 이번 미사일 공격에 푸틴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더욱 굳건히 하는 분위기"라며 "공격이 러시아의 사기를 약화시키기는커녕, 자신들이 희생자이며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인들을 더욱 세게 공격해야 한다고 믿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WP의 인터뷰에 응한 55세의 야나는 "그들이 우리를 겁주고 있지만, 나는 꺾이지 않을 것"이라며 "내일 푸틴 대통령에게 한 표를 던지겠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군의 포격을 받은 러시아 벨고로드 지역의 분위기를 전한 미 워싱턴 포스트 웹페이지/캡처

러시아 대선(15~17일)을 겨냥해 연일 계속된 우크라이나군의 미사일·드론 공격에 일부 무장병력의 국경 마을 침투까지 이뤄지자, 러시아군도 보복 공격에 나섰다. 우크라이나측의 선거 방해 행위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푸틴 대통령의 전날(14일) 경고에 따른 것으로 관측된다. 러시아는 15일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오데사로 미사일 공격을 가해 최소 20명이 사망하고 70명 이상이 다쳤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대선을 방해하기 위해 러시아 민간 마을을 포격하고 있다"며 "이러한 범죄를 처벌하지 않고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15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시절 중국에서 반정부 여론을 조성하려는 미 중앙정보국(CIA)의 비밀 작전을 승인했다는 외신 보도를 언급하며 미국은 현재 러시아를 상대로 비슷한 공작을 수행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수년간 이 같은 활동을 경험해 왔다는 것"이라면서 "미국 정보기관들은 우리나라에서 같은 일을 해왔고 여전히 그렇게 하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 나발니 지지세력의 '정오' 시위는? 

주목되는 것은 투표 마지막날(17일)의 반푸틴 시위다. 나발니의 측근들과 그의 부인 율리아 나발나야는 러시아인들에게 '푸틴에 맞서는 정오'로 불리는 반푸틴 시위의 참여를 촉구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 체제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러시아인의 저항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17일 12시 전국의 투표소로 모여라는 것이다. 일종의 '플래시 몹' 이벤트다.

나발나야는 "이는(12시 투표소 집결) 매우 단순하고 안전한 행동으로, 누구도 막을 수 없다"며 "같은 생각을 가진 수백만명이 한 곳에 모여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전쟁과 부패, 불법에 반대하는 사람이 주변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발니의 체포 직후 석방 요구 시위에 나선 나발나야/사진출처:텔레그램 

나발니 측근들은 또 지지자들에게 푸틴 대통령이 아닌 다른 대선 후보에게 투표하거나 2명 이상의 후보에게 기표해 무효표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러시아 사법 당국도 17일 정오 시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반정부 언론에 따르면 투표소 경비 경찰들에게는 투표소로 나오는 사람들 중 누가 나발니 관련 도구나 야권을 상징하는 '흰색-파란색-흰색' 깃발, 우크라이나 상징물 등을 지녔는지, 또는 수상한 행동을 하는지 철저히 살펴보라는 지시가 내려갔다고 한다. 또 투표 참관인은 17일 정오 투표소 앞과 내부에 모인 사람을 영상으로 촬영하라는 지침을 받았다고 러시아 독립 선거감시단체 골로스(목소리)는 주장했다. 

러시아 당국이 '정오 시위'를 방해하기 위해 17일 정오 대신 오후 5시에 투표소로 나오라는 가짜 메시지를 발송했다는 전언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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